40 여자나이 스물일곱 꽁트*꽁트



여자나이 스물일곱


 

온 몸이 근질근질한 게 도무지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날씨는 왜 이렇게 덥고, 모기새끼는 웬 원수가 졌다고 앵앵거리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이 밤중에 누굴 부여잡고 이 약통을 버릴 수도 없었다. 괜한 짜증에 신경질이 났다. 자리에서 비실비실 일어나 방문을 나서는데 물주전자 대신 하얀 전화통이 내 눈에 비쳤다.


나도 모르게 전화통 앞에 가서 바짝 약이 오른 사람처럼 흥분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히스테린가 뭔가 한다더니만……. 그것도 순간뿐 누군가에게 이 더운 여름에 시원스레 목을 뽑고 싶어 안달이 났다.


때르르릉, 때릉, 때르릉,

때르르릉, 때릉, 때릉, 때르릉

다이얼을 돌리자 신호가 한참 가서야 어떤 사내가 졸린 목소리로 받았다.
시계소리가 한번 울렸다.


“야, 이 새끼야! 지금이 몇 신데 자빠졌니? 시팔 놈 같으니라구. 그래 이 쌍놈아 두 족다리 뻗구 자빠지니까 해골이 가볍냐?! 아니면, 무겁냐? 이 도둑놈아, 전화통에 불이 나면 빨리 받아야 할 거 아냐! 이 시팔 놈아!”


쉬지 않고 무작정 욕을 해대는 동안 저쪽에선 아닌 밤중에 뭐라는 격으로 한동안 여보시오만 되풀이 하더니 장난 전화인 걸 알고는 사이사이에 욕설로 대꾸를 했다.


“아니, 이 미친년이 한밤중에 웬 발광이야.”

“그래. 이 빌어먹을 쌍놈의 새끼야.”


“별 미친년이 비가 안 오니깐 더위에 미쳤냐? 야 이년아. 미치려거든 곱게 미쳐라.”

사내는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
그래도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았다.
잠시 동안 해댄 욕으로도 아직 남은 욕들이 뱃속에서 꿈틀거렸다.


“야, 이 더러운 개놈의 자식아. 왜 끊구 지랄이야!!”

곧바로 욕을 해댔다. 이번에는 저쪽에서 내 목소리를 듣자 이어서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화가 엄청난 모양이다.  만나서 따져 보자는 둥, 두 번씩이나 우리 집에 전화를 하는 것으로 봐선 뭔가 유감이 있는 것 같은데 만나서 해결하자고 악을 썼다.


전화선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을 내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좀 더 약을 올려주고 싶은 생각으로 계속 욕을 해대고 일방적으로 끊어 버렸다. 이제 좀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무더위도 사라지고 서늘한 기운마저 감돌고 몸도 한결 가뿐해진 기분이다.


시계 종소리가 두 번 울렸다.

한밤중에 거친 비밀이 생기고 나니 며칠 동안 즐거운 기분으로 지냈다. 그날 새벽에 있었던 일은 말끔히 잊고 부산한 아침을 맞이했다. 나는 거울 앞에서 머리 손질을 하다가 피식 웃었다.


여자가 시집갈 나이가 들어서도 시집을 가지 못하고 늙으면 그 해가 거듭할수록 느는 건 히스테리와 수다와 주름뿐이라 했던가. 어찌 했거나 출근준비를 마치고 일어서려는 데 초인종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곧이어 엄마가 누구냐고 묻고 젊은 사내의 음성이 내 가슴을 먼저 두드렸다.


“이곳 전화번호가 612-780X죠?”

“네-. 그렇습니다만 어떻게 오셨는지요?”


흥분한 사내의 목소리와 의아하다는 듯이 살피는 엄마의 소리가 나를 아찔하게 만들었다. 사내는 그날 밤 사건 아닌 사건에 대해 자초지종을 말하고 엄마는 그럴 리가 없으며, 우리 집에는 여자라고는 과년한 딸과 나 뿐인데 얌전하기로 소문난 우리 집 애가 그랬을 리는 없고, 환갑을 바라보는 내가 그런 전화질을 할 까닭이 무어냐며 연설을 하였다.


엄마가 해명을 할 때마다 사내는 틀림없이 이 집이며 전화국에서도 그날 밤에 두 번 전화한 번호가 이 번호라는 것을 확인하고 왔다고 악을 써댔다. 저렇게 떠드는 것을 봐선 아직까지 무척 화가 나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식은땀이 나고 별 으스스한 생각이 나를 묶어 두었다.


아무리 그렇기로 서니 저렇게 새벽부터…….

그러나 저러나 이것은 현실이다. 뒷문이라도 없을까 하여 이 궁리 저 궁리를 해봤지만 통할 문은 대문뿐이다. 이런 낭패가 없다. 입 한번 잘못 놀려 호되게 욕먹는 구나. 방문을 삐죽이 열고 그 사내를 한번 보기나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이게 어쩐 일이란 말인가! 사내는 요즘 보기 드문 미남에다가 말쑥하게 차려입은 것에 호감이 갔다.


에그머니, 이 지경에도…….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그리고 용기를 냈다. 보아하니 험상궂지도 않고 저런 사람이 설령 내가 그랬다고 꼬집어 내더라도 시치미를 떼면 그만이니까.


“엄마, 다녀올게요.”

일부러 한 옥타브 올려 아침 인사를 했다. 그때다.


“여보슈, 아가씨!”

들은 척도 안하고 대문을 향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걸었다. 등에선 땀이 흐르고 다리가 떨리지만 애써 침착해 지려고 노력했다. 사내는 이제 엄마보다는 내가 적임자라고 생각했는지 얼른 뛰어와 대문 앞을 막아서며 자신 있는 목소리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가씨죠? 그렇죠?!”

“뭘 말이에요?”


“다 아실 텐데, 오밤중에 대체 뭔 짓이요?”

나는 계속 시치미를 뗐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몰라도 난 바쁘니까 저희 엄마한테 말씀해 보세요.”

사내를 밀쳐내며 문을 나서서 뛰기 시작했다. 한쪽에선 웃음이 나고 다른 한쪽에서는 미안한 감이 엇갈렸다. 사내도 뛰어오는지 이른 아침에 발소리가 동네공기를 울렸다.


사내는 뒤쫓아 와 아예 노골적으로 내 팔을 잡고 흔들며 외쳐댔다. 마치 진범을 잡은 형사나리 마냥 눈에는 총기마저 감돌았다. 나는 상관하지 않고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갔다. 사내도 쫓아오며 계속 그 이유가 뭐냐며 따라붙었다.


광명시에서 여기까지 오느라고 잠도 못자고 택시비에다 집을 찾느라 고생했다며 꼭 이유를 알아야만 돌아가겠노라고, 나중에는 아예 통사정을 했다. 협박 다음에 사정이라니. 버스까지 함께 타고내리는 사내의 끊질 김에 그만 지고 말았다.


사내는 내 사무실 근처의 다방으로 나를 밀치고 들어갔다. 다방은 아직 한산하여 한쪽에선 청소를 하는 중이다. 너무 이른 손님에 놀란 종업원이 우리 둘을 쳐다보았다. 우리는 나란히 마주 앉아 마치 맞선보는 사람들처럼 인사를 나누었다.


“전 이혜경이라고 해요.”

“전 박경태라고 합니다.”

1984

 

[꽁트*꽁트]

 

 

 

 


덧글

  • 제로데몬 2011/04/21 14:21 # 답글

    아니 뭐이렁....
    뒤통수 한대 맞고 갑니다;;
  • 폴라러브 2011/04/21 22:01 #

    이런...ㅋ~ 지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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